겨울을 난 고추

작년 10월에 심어 자라난 고추들

강영은 

지난 늦가을 초겨울에 
뜨거운 태양도 사라지고
화려하게 열매 맺던 시절 지나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식물들 다 뽑아버리고 
떨어지는 낙엽을 피해
바깥 식물들이 따뜻한 안으로 숨어들어왔다 

춥고 매서운 바람부는 기나긴 겨울을 
아무런 생명 없이 버틸 수 있을까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당에 마늘 심고 낙엽 덮어 인사하고 
소망을 담아 봄꽃 알씨들 줄줄이 차례 세워 놓고 흙에 파묻고
큰 기대없이 그저 작는 희망가지고 푸릇 새싹들 보려고 
해 잘 드는 창가에 허브들, 깻잎, 고추를 심었다 

추수 감사절, 크리스마스, 새해를 지나면서 
조금씩 얼굴을 내민 새싹들
밥 지을 때마다 예쁜 쌀뜻물 모아다가 목욕도 시키고
작은 막내 손에서 만들어진 커피가루 계란 껍질 비료 간식먹고
하루 하루 자라더니 
눈폭풍이 선물한 커다란 눈에서 놀고 와보니 
이렇게 빼꼼히 고추들이 얼굴을 내민다

“거봐요! 이번엔 날 줄 알았어요!”
5개월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던 화분에서 
주렁 주렁 눈을 뚫고 나온 고추를 보며 
씨를 심은 딸이 기쁨에 발을 구르며 
위 아래로 춤을 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느리지만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추위를 견디고 
짧은 겨울 해에 감사하며 
이렇게 자라준 나의 겨울 고추들 

나도 너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절망만 노래하는 이 세상 겨울에 
희미하지만 분명히 있는 생명줄을 놓지 않고 
불안의 바람과 고뇌의 눈폭풍 속에서 
따스한 햇살 맞으며 내 소명따라 이 자리를 지키련다 

겨울에도 고추가 날 수 있음을
절망 속에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음을 
폭력 속에서 비폭력의 춤을 출 수 있음을
무자비속에서 자비로운 속삭임을 전할 수 있음을 
저주가 오가는 삭막함 속에서 축복의 시를 쓸 수 있음을 
미움의 싹을 뽑아내고 사랑의 씨를 심을 수 있음을 보여주소서




Comments

  1. 늦가을에도 씨를 뿌리는군요! 정말 부지런하신 목사님! 목사님의 생명에 대한 열정과 능력이 늘 놀라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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